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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실

보도자료실 〔한겨례〕두렵고 무서웠다고…성폭력 상처 드러내니 치유가 시작되더라
2013-10-28 08:36:42
여수성폭력상담소 <> 조회수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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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 10주년

9차례 대회 동안 피해자 50여명 참여
숨겨둔 아픔 공개적으로 이야기
“내 고통 인정받는 유일한 자리”

피해자들 ‘자조 모임’도 꾸려 만남
상담소 쪽 “수동적인 피해자 넘어
삶 의지 되찾는 생존자로 거듭나”
“그 사람이 뒤에서 덮쳤어요.”

이 말 한마디를 꺼내는 데 15년이 걸렸다. “무척 두렵고 무서운 기억들이었는데… 하나씩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어요. 저한텐 너무나 중요한 ‘퍼즐 맞추기’였어요.” 한새(가명·여·40대 중반)씨의 목소리는 가뭇없이 떨렸다. 불혹을 앞둔 2007년, 그는 가슴 깊이 가라앉아 있던, 20대에 겪은 성폭력 피해를 다른 이들 앞에서 끄집어냈다.

제5회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를 앞두고 마련된 사전 모임에서였다. 심리극을 연기하며 한새씨는 감춰둔 기억을 수면 위로 건져올렸다. “내가 힘들어하니까 진행자가 내 자리에 다른 사람을 눕게 하고, ‘본인에게 해줄 말이 있으면 하라’고 했어요.” 그때, 그는 “잘 견뎠다”고 스스로에게 말을 거듭 건넸다. 한새씨는 “스스로에게 한번도 말해준 적이 없는 말이었는데, 무척 듣고 싶은 말이었나 보다”고 말했다. 담담했다.

한새씨는 앞서 제3회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를 지켜보면서 스스로 ‘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성폭력 피해를 이야기하는 ‘말하기 참여자’와 여기에 귀 기울이기로 약속한 ‘듣기 참여자’ 가운데, 한새씨는 듣기 참여자로 먼저 나섰다. “옥상으로 올라가 항아리를 붙잡고 울었다”던 한 생존자의 이야기에 마음이 움직였다. “친족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한 분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 늘 옥상으로 올라갔었대요. 가해자를 보지 않고 혼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는데, 직접 손으로 항아리 잡는 흉내를 내더라고요. ‘항아리는 말을 못하니까 내 얘기를 옮기지도 않고, 나를 비판하지도 않고, 또 동그랗고 품에 싹 안긴다’면서…. 아무 비판 없이 항아리처럼 안아주는 사람, 그런 위로가 저한테도 필요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새씨는 결심한 지 2년 만에 ‘말하기 참여자’로 나섰다. 대회를 치른 뒤 3주 만에 그는 중학교 1학년이던 아들에게도 피해 경험을 털어놨다. ‘지인’에게 말한 최초의 경험이었다. 놀란 아들이 한새씨에게 되물었다. “왜 나한테 말해줘?” “니 엄마한테 일어난 일이니까. 그리고 니가 남자니까.”

한새씨는 “아들이 어려서 말해도 될까 고민했는데, 아들은 비판도 비난도 없이 생각보다 잘 받아줬다. ‘앞으로 엄마한테 어떻게 해야 해?’라고 묻길래 ‘그냥 똑같이 대하면 돼’라고 알려줬다”고 말했다. 이후 한새씨는 아들과 함께 매년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에 ‘듣는 사람’으로 참여하고 있다. “아프거나 분노하는 감정을 드러내고, 내 경험을 인정받을 수 있는 안전하고 유일한 자리에요. 울기도 하지만 함께 즐기고 웃으면서 긍정적인 힘도 많이 받아와요.”

한새씨만이 아니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공개적인 말하기를 통해 치유의 주춧돌을 놓았다. 7회 참여자인 바다(가명·30·여)씨는 “말하기를 통해 내가 내 일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생각하고, 도움을 얻는 게 시작됐다. 이전까진 ‘결국 지는 싸움’이었다면, 말하기를 통해 다른 출구를 찾은 느낌이었다. 피해자들이 다른 삶을 원한다고 할 때 말하기를 꼭 권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제10회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가 25일 서울 삼성동 베어홀에서 열린다. 2003년 1회 행사 이후 2012년까지 모두 50여명의 성폭력 피해자들이 피해 경험을 알렸다. 상담소 쪽은 여기에 참여한 이들이 상처에 압도되는 수동적인 ‘피해자’를 넘어, 자기 경험을 적극적으로 감싸안은 ‘생존자’로 거듭났다고 본다.

2010년 11월 서울 동작구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열린 7회 ‘춤추는 오름길’ 무대에서 ‘코러스’ 참여자들이 합창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이 대회에서는 말하기·듣기 참여 외에 성폭력 피해 생존자를 지지하는 여성들을 ‘코러스’라는 합창단원으로 별도 모집했다. 성폭력상담소 제공

성폭력 피해자를 ‘생존자’라고 부르자는 제안은 트라우마 연구자들과 여성운동가들로부터 나왔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마치 전쟁·재난 피해자들처럼 안전하다고 믿던 세계 자체가 깨지는 큰 충격을 입은 뒤 사건 이후 삶의 의지를 되찾으려 고군분투한다는 점에서, 생존자로 존중돼야 한다는 뜻이다. 여성학자 권김현영씨는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는 마치 법정에서 하듯 피해의 사실관계를 증명하고 호소하는 데 초점을 두는 게 아니라, 피해 경험 이후에도 삶을 이어가는 생존자로 존중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수용·공감하는 데 중점을 둔다”고 말했다.

생존자들은 미디어에 비치는 ‘피해자다운 피해자’에 대한 각종 편견이 사라져, 더 많은 피해자들의 숨통이 트이기를 바란다. 6회 참여자 서은(가명·37·여)씨는 “성폭력이 늘 일탈적인 ‘사건’으로 나오기 때문에 피해자 상이 고정되는 것 같다. 그런데 모두 일상의 문제다. 듣는 사람들이 피해자의 삶의 맥락을 더 고려해주면 말하기가 편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생존자들은 또 공개적 말하기를 통해 자신뿐 아니라 사회도 함께 치유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 강사로 일하는 한새씨는 경찰·사법기관·교육청 등의 공공기관에서 강연을 할 때는 ‘위험을 감수하고’ 피해 경험을 일정 부분 공개한다. “제 경험을 열심히 나눠서,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게 제 꿈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