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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실

보도자료실 〔조선일보〕"낙태하려면 당신이 성폭력 피해 입증해!"
2013-08-29 08:55:52
여수성폭력상담소 <> 조회수 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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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은 지 두 달. 몇 달째 잠을 설친 김지혜(가명·25)씨 얼굴에는 피로감이 가득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트레이닝복을 걸친 차림으로 기자를 만난 김씨는 “더이상 아이를 못 기르겠다. 며칠 전에는 아이를 고아원에 버리려고 했다”며 힘없이 말했다. 김씨가 사는 곳은 33㎡(10평) 남짓한 다세대주택. 아들을 어르느라 앞건물에 가려 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방 창틀에 기대어 선 김씨가 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작년 가을까지만 해도 김씨는 서울 강남구에 있는 한 회계법인에서 사무직으로 일했다. 2년 넘게 만난 남자친구도 있었다. 9월, 회식 자리가 끝나고 상사가 집에 데려다 주겠다는 것을 거절하지 못했던 게 불행의 시작이었다. 대리운전 기사를 불렀다며 자신의 차가 주차돼 있던 회사 근처로 김씨를 데리고 온 상사는 회사 건물의 화장실에서 김씨를 성폭행했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더 저항할 수 있지 않았을까, 후회도 해요. 당시에도 저항하다 자포자기했던 심정 때문에 ‘너도 즐긴 거 아니냐’는 얘기 들을까봐 신고를 못한 것도 있어요.” 게다가 전체 직원이 10명도 안 되는 작은 회사에서 성폭행 사실을 알리기란 쉽지 않았다. 심지어 남자친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개한테 물린 셈 치자, 성폭행 한 번 당한다고 죽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연말 즈음 김씨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생리를 하지 않는 데다 입덧 기운이 찾아온 김씨를 의아하게 여긴 남자친구가 임신테스트를 권유한 것이다. 병원에 가보니 임신 13주. “남자친구는 피임을 철저하게 했어요. 남자친구가 충격 받는 것을 보고 사건을 얘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씨는 남자친구와 의논한 끝에 낙태를 하기로 결심했다. “알아보니 성폭행 피해자는 낙태를 할 수 있대요. 그래서 상담소를 찾아갔는데, 인정을 받으려면 고소를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때 가서 고소해봤자 소용 있었겠어요? 그냥 포기했지요.”

김씨처럼 아이를 낳았다가 비극적 결말을 맞은 사건이 얼마 전 발생했다. 지난 8월 13일 영아살해 혐의를 받아 도주하던 20대 여성이 충남 천안에서 붙잡혔다. 이 여성은 작년 3월 성폭행당한 후 임신 사실을 뒤늦게 알아 지내다 작년 12월 무렵 아들을 낳았다. 그는 산후우울증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지난 4월 24일 자신이 살던 광주 서구의 집에서 아이의 코와 입을 손수건으로 막아 숨지게 했다. 김씨는 기자에게 이 사건을 언급하며 “가해자에게 매우 공감이 갔다”며 “돈 없고 두려워서 낙태하지 못한 걸 지금 후회한다”고 힘없이 말했다.

◇성폭행 피해자라고 해도 고소 당할까봐 의사들이 낙태수술 꺼려

우리나라 형법상 낙태는 불법(형법 제269조)이다. 모자보건법에서는 예외적으로 인공유산을 허용하고 있는데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전염성 질환 및 혼인 불가능한 친족 간 임신, 그리고 강간 혹은 준강간에 의한 임신일 경우이다. 이때에도 모체의 건강을 고려하여 임신 24주 이하인 경우에만 낙태가 가능하다. 그러나 규정은 이것이 전부라 허용 사유에 해당하는지 판단할 만한 구체적 근거가 전혀 없다. 성폭행 피해자가 합법적으로 낙태하려면 자신의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가해자가 성폭력으로 처벌을 받은 경우다. 그러나 대개는 임신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성폭력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이거나 신고조차 하지 않아 새로이 성폭력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 6월부터 성범죄에 대한 친고제가 폐지되면서 반드시 고소해야 한다는 부담은 조금 덜었지만, 여전히 성폭력 피해 사실을 입증하려면 형사상 유죄 판결 내지는 경찰의 기소의견이나 검찰의 기소처분이 필요하다.

김미순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공동대표는 주간조선에 “피해 여성 구제가 목적이 아니라 낙태할 경우 처벌받지 않기 위해서 낙태 가능 여부 판단을 법원으로부터 구한다. 이렇다 보니 막상 피해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없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피해를 입고 임신을 한 것은 여성인데, 낙태 판단의 주체는 여성이 아니에요. 누구도 쉽게 ‘낙태하라’고 말하지 못하죠. 만약 고소한 것이 무죄로 판명날 경우에는 불법 시술을 한 것이 되니까요.”

이경환 변호사(법무법인 태평양)는 “형사 판결에서 가해자에 대해 무죄가 선고된다는 것이 곧 ‘성폭력 사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성폭력 사실에 대해 처벌을 하기에는 불충분하다는 의미에 불과할 뿐이며 모든 심증이 갖춰져도 증거가 부족해 법적으로 처벌할 근거가 약해 무죄 판결이 난 경우는 실제로도 많다.

작년 2월 9살 난 여자 어린이를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70대 남성에 대해 증거불충분 등으로 무죄 판결이 내려진 적도 있다. 당시 사건을 판결했던 광주고법 전주 제1형사부(부장판사 이상주) 재판부는 “피고인이 피해자를 성폭행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이 든다”면서도 “피해자 진술은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확신을 가지게 하는 증거로 볼 수 없다”고 무죄 선고 이유를 밝혔다. 특히 데이트 강간, 부부 강간 등 친밀한 관계에 있던 사람에 의해 이뤄진 성폭행 피해자는 성폭력 사실을 인정받기가 더 어렵다.

의사도 성폭력 피해자의 낙태수술을 꺼리는 편이다. 성폭력 전담 의료기관은 전국에 329곳, 산부인과만 따졌을 때도 230곳이 되지만 2009년에서 2012년 12월까지 4년 동안 성폭행 피해자 낙태수술을 한 기관은 67곳에 불과하다. 주간조선이 접촉한 경기도 화성시 소재의 한 산부인과는 전담 의료기관으로 지정된 곳이지만 낙태수술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 이 병원 원장은 익명을 전제로 “2~3년 전, 성폭행 피해자라고 해서 낙태수술을 했다가 고소당할 뻔했던 적이 있다”며 털어놓았다. 사건 수사가 난항을 겪으면서 가해자가 병원을 상대로 고소하겠다고 윽박지른 것. “그 이후로 확실한 피해자만 받고 있는데 그 이후 수술을 한 피해자는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미경 이화여대 리더십개발원 특임교수(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사)가 책임연구원을 맡아 제출한 ‘성폭행 피해자 인공 임신중절수술 지원실태 및 개선방안 연구’ 보고서를 보면 2009년부터 2012년 6월까지 3년 반 동안 전국 성폭력 상담기관 240곳에 접수된 성폭력 상담 건수는 총 12만368건. 이 중 임신 관련 상담 건수는 2362건이다. 그러나 실제로 지원을 받은 피해자 사례는 460건에 불과하다. 성폭행 피해 사실이 반드시 입증돼야 합법적으로 낙태할 수 있다는 점은 성폭력 상담소에서 일하는 상담사에게도 부담으로 작용한다. 고양시 한 성폭력 상담소에서 4년간 근무한 상담사 박지윤(가명)씨는 “만약 고소했다가 법정에서 성폭행이 아니라고 하면 역고소를 당할 수도 있어 항상 소극적인 상담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미경 이사 등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로 임신한 여성들이 원하는 것은 고소를 통한 법적 처벌(18.0%)이 아니라 인공 임신중절수술(64.8%)이다.

◇모자보건법상 낙태 허용 근거 없어... 구체적 시행령 마련해야

그나마도 성폭력 피해 사실이 확인되고 나서 수술을 받으려면 이미 법적으로 정해진 허용 기준인 24주를 넘긴 경우도 생긴다. 양아버지에게 3년 동안 성폭행당하다가 임신했던 18살 피해자가 낙태 시술 시기를 놓쳐 결국 출산하고 아이를 입양 보냈던 일이 있다. 당시 담당 상담사였던 박지윤씨는 피해자가 상담소를 찾은 것은 임신 16주차 때라고 기억했다. “주변에서 신고를 권유해서 신고해 결국 기소까지 됐지만 막상 낙태 요건이 갖춰지자 출산 예정일이 다가왔다. 마음고생은 마음고생대로 하고, 원하지 않던 고소 절차만 밟았다”며 아쉬워했다.

청소년이나 지적장애인 같은 사회적 약자에게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임신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는 사례도 많고, 성폭력의 의미를 잘 모르는 지적장애인들은 피해 사실을 인지하고 입증하는 데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김미순 공동대표는 “성인도 부담스러워하는 고소를 부모나 보호자 동의가 필요한 미성년자들이 선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임신 사실을 숨기다 출산해 영아를 유기하는 사례도 있고, 몰래 불법 낙태수술을 받는 사례도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보호자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미성년자는 이런 지원 제도를 이용할 기회를 아예 박탈당하게 된다. 17살 때부터 1년간 친아버지에게서 성폭력을 당해 임신했던 한 청소년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학교 선생님의 도움으로 상담소를 찾아왔지만 아버지를 고소하면 당장 생활이 어려워져 고소를 단념했다.

절차가 까다롭고 지원받을 때까지 대기 기간이 긴 우리나라와 달리 병원이나 법원에 ‘선서진술서’만 제출해도 낙태수술을 받을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지난 7월 5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국회 성평등정책연구포럼(남윤인순 의원 주관)이 연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피해자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 토론회에서 이경환 변호사는 미국 뉴멕시코주의 형법을 예로 들었다. 이곳에서는 피해자가 낙태수술을 받기를 원한다면 병원의 특별위원회에 “나는 강간을 당했으며 그 강간 사건은 이미 경찰 등 법집행기관에 신고되었거나 신고될 예정이다”는 내용의 선서진술서를 제출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경환 변호사는 “법적인 절차 이전에 임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법”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절차가 허위 성폭력 신고를 증가시킬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도 이경환 변호사는 “연구에 따르면 허위 강간 보고 사례는 약 2%로 다른 범죄와 크게 다르지 않다”면서 “지금처럼 임신의 입증 책임을 전적으로 피해자에게 부담하는 것은 더 큰 문제를 불러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모자지원법이 피해자에게 실질적 지원이 이뤄지기에는 제도적 허점이 많다며 형법상 피해를 입증하는 것보다 피해 사실에 집중해서 낙태를 허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이미경 이화여대 교수는 “무엇보다 성폭행 피해자를 낙태의 판단 주체로 인정해야 하는데 공동위원회나 상담기관의 상담사실확인서 등을 그 근거로 삼을 수도 있다”며 “고소 사실을 근거로 낙태를 허용할 때에도 상황의 위급성을 고려해 최대한 가까운 시일 내에 허용 여부가 판가름나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모자보건법상 낙태 허용 근거가 없기 때문에 구체적 시행령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우리나라 성폭력 사건의 고소율은 12.6%에 불과하고 그나마 고소된 사건의 기소율도 43.2%에 그친다. 성폭력 피해에 대한 올바른 사회적 인식이 부족한 탓인데, 이 때문에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를 입증하는 과정에서 2차 피해를 보기도 한다. 여성가족부는 올해 들어 ‘성폭행 피해자 등을 위한 통합지원센터 사업안내’를 발표하면서 피해자의 지원 요청이 접수되면 최대 2주 이내 결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지원 수칙을 정한 바 있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다.

최창행 여성가족부 권익정책과장은 “모자보건법에 구체적인 입증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면서도 “계속해서 노력을 기울일 예정”이라는 입장만 밝혔다.